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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길 위의 역사 2부(무오사화) -3회, 김일손 잡으러 경상도 가다.
김세곤 (칼럼니스트) 의금부 홍사호와 신극성 경상도로 달려간 것은 김일손 압송하기 위함
등록날짜 [ 2018년08월14일 18시51분 ]

1498년 7월1일자 ‘연산군일기’의 뒷부분을 읽어보자   

이윽고 의금부 경력(義禁府 經歷) 홍사호와 도사(都事) 신극성이 명령을 받들고 경상도로 달려갔는데, 외부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를 알지 못했다.

의금부가 어떤 곳인가? 조선시대 왕명을 받들어 중죄인에 대한 옥사를 처리하는 특별사법관청이다. 의금부 경력(經歷, 종4품)과 도사(종5품)가 2명(정원 10명)이나 경상도로 달려간 것은 큰 옥사를 짐작케 한다. 또한 이 일은 외부사람들에게는 극비로 진행되었다.  1)

사진 1  의금부 터 (서울 종각 전철역 근처)

사진 2  의금부 터 표시 안내판

 
홍사호와 신극성이 경상도로 달려간 지 열흘이 지난 7월11일에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모두 대내(大內)로 들여오라.”고 전교하였다. 실록청 당상 이극돈 · 유순 · 윤효손 · 안침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사초는 임금이 스스로 보지 않습니다. 임금이 만약 사초를 보면 후세에 직필(直筆)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즉시 빠짐없이 대내로 들이라.” 하였다.
(후략)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1일자)



7월11일자 연산군일기와 7월1일자 연산군일기를  연관시켜 보면, 7월1일에 유자광 등이 연산군에게 아뢴 비사(秘事)가 바로 ‘김일손의 사초’였고, 그 사초는 『성종실록』 편찬과 관련된 일이었다.

따라서 의금부 관원 홍사호와 신극성이 경상도로 달려간 것은 김일손을 압송하기 위함이었다. 당시에 김일손은 1496년(연산군 4년) 윤3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경상도 청도군에 있었는데 상복을 벗자 풍질(風疾)이 있어 함양군 청계정사에서 요양 중이었다.   

사진 3 경남 함양군  청계서원

그러면 연산군이 잡아오라고 한 김일손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2)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은 경상도 청도군에서 살았는데 17세인 1480년에 밀양에 가서 김종직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고, 1486년 9월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1월에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제수되었고 12월에 정자 겸 춘추관 기사관이 되었다. 1487년 10월에는 노모 봉양을 위해 진주목학의 교수로 부임했다가, 1489년 11월에 요동 질정관으로 중국 북경에 다녀왔다.

1490년 3월에 김일손은 승정원 주서 겸 예문관 검열에 제수되었다. 이 무렵 그는 경연에 입시하여 노산군(단종)의 입후(立後 : 양자를 세우는 것)을 주청하였고, 사관에 입직하여 사초를 닦으면서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수록했으며, 4월에는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을 ‘승정원일기’ 등을 참고하여 교정 · 감수하였다. 

1490년 8월에그는 홍문관 수찬이 되었고, 9월에는 남효온과 함께 삼각산 중흥사(中興寺)에서 김시습을 만나 함께 백운대에 등정하고 5일간 같이 지냈다. 11월에는 진하사 서장관으로 연경에 갔는데 1491년 2월 연경에서 예부원외랑 정유를 만나 『소학집설』을 얻었는데, 3월 중국에서 귀국하여 복명하고 소학집설을 인쇄하여 출간했다.


1491년 8월에 김일손은 병조좌랑·이조좌랑이 되었는데 10월에는 충청도사에 보임되어 직언을 구하는 왕의 교지에 따라 소릉(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 권씨의 묘)의 복위를 주청하는 소를 올렸다. 1492년에는 홍문관 부교리에 직을 두고 호당에서 사가독서를 했고, 1493년 1월에는 홍문관 교리로 승진했으며, 7월에는 예문과 응교로 직을 두고 사가독서 했다. 1494년 9월에는 이조정랑 겸 춘추관 시독관에 제수되었는데 12월24일에 성종이 승하하였다.

연산군이 임금이 되자 김일손은 1495년 2월에 신병으로 사직을 주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고 충청도 도사로 근무하였다. 김일손은 5월28일에 시국에 관한 병폐 26개 조목을 상소하였다. 여기에는 언로 확충, 사관 확대, 소릉 복위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연산군은 어떤 비답(批答)도 내리지 않았다. 3)

1495년 10월에 김일손은 사간원 헌납(정5품)에 제수되어 수륙제 금지와 소릉 복위를 주청하였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호노가 아귀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불교의식을 말하는 데, 고려시대부터 시작하여 조선시대 초에 성행했다. 조선 왕실에서는 유교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수륙재는 관행처럼 이루어져 왔는데 연산군도 수륙재를 지내는 것을 허용하려 하자 1495년 11월에 헌납 김일손은  사간 이의무, 정언 한훈 · 정언 이주 등과 함께 수륙재를 반대하는 상소를 수차례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2월30일에 헌납 김일손은 대사간 김극유, 사간 이의무, 정언 한훈· 이주와 함께 소릉의 복위를 헌의(獻議)하였다. 이는 사간원 직원 모두가 헌의한 것이었다. (연산군일기 1495년 12월 30일 묘제에 대하여 김극뉴 등 간원이 헌의하다) 4)

한편 김일손은 1496년 2월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서를 내고 고향인 청도로 내려갔는데 윤3월29일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상복을 입었다.  1498년 6월에 김일손은 상복을 벗고 함양에 가서 정여창을 만났다. 그런데 풍병이 생겨 함양 청계정사에서 요양 중이었는데 7월5일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당했다.  (탁영선생 연보 P 694-695)



1) 의금부의 구성을 보면, 당상관은 4인으로 판사(判事, 종1품)·지사(정2품)·동지사(同知事, 종2품)를 두었으나 모두 겸임하게 하였다. 당하관은 10인으로 경력(經歷, 종4품)과 도사(종5품)를 두었다.

의금부의 위치는 한성부 중부 견평방(堅平坊 : 현재 종로구 견지동)에 있었다. 지금의 종각 지하철 역 제일은행 앞이다.  



2) 김일손의 약력은 아래 문헌을 참고하였다.

o 박주, 역사정신을 구현한 사관 김일손, 한국사인물열전 1, 돌배개, 2003, p 440-456

o 탁영선생연보, 지은이 김일손 옮긴이 김학곤 · 조동영,    탁영선생문집,  탁영선생숭모사업회,  2012,  p 687-700

3) 연산군일기 1495년(연산1년) 5월28일에 ‘충청도 도사 김일손이 시국에 관한 이익과 병폐 26조목을 상소하다’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4) 사간원은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했던 기관이다. 임금에 대한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한 관청인 사간원은 대사간(정3품) 1명, 사간
(종3품) 1명, 헌납 (정5품) 1명, 정언(정6품) 2명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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