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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칼럼&강항선생의 수은집, “혹부리 영감과 도깨비” - "유계(瘤戒)”
어쩌면 "혹부리영감과 도깨비" 부분인 "유계(瘤戒)"의 국역문 원고 있을 것 같아 그것부터 찾아봐야 겠다!!
등록날짜 [ 2018년08월17일 17시11분 ]

수은 선생하면 떠 오르는게 일본에 성리학을 전한 학자, 그리고 저술로 <간양록(看羊錄)>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웬 ‘뜬금없는’ “혹부리 영감”, “도깨비”인가 할 게다. 강항(姜沆, 1567~1618), 선생 문집에 실려 있다.

오래전 일인데 <수은집(睡隱集)> 국역 사업에 끝자리로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1988년의 일이다. 한학하신 어르신이 국역한 원고를 보고 윤문과 교열을 하는 공부길이었다. 나중에 편집과 발간까지 맡은 셈이 되었다.

 

그때 <수은집>에서 읽은 게 저 “혹부리 영감, 도깨비” 설화이다. “유계(瘤戒)”라는 제목의 글이다. <수은집> 권3 잡저(雜著)에 실렸다. 어릴적 들었던 “도깨비”, “혹부리 영감”, “혹떼려다 붙인 욕심” 그대로이다. 여송(呂宋)의 이야기로 적고 있다.

일본에서 적거생활을 할 때 들은 ‘여송’의 설화를 글로 옮긴 것 같다. 수은이 이 글을 쓴 것은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경계의 글이다. “하나의 혹을 떼려다 두 개의 혹을 얻은 것과 무엇이 다른가.”로 마무리 한다. 그렇지만 그 내용과 전래 경위가 궁금할 수 밖에 없다.

 

여송(呂宋). 루손(Luzon) 섬. 지금의 필리핀 군도 최북단에 위치한 주요 섬. 여송은 명나라 초기 이래로 중국과 교역이 있었으며, 1571년 스페인이 마닐라를 정복한 시기부터 일본인도 이곳에 적지 않게 도항하여 이주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일본사람들이 ‘여송’에 살면서 들은 이야기가 일본으로 전해졌고, 이를 일본에서 순수좌(舜首痤)로부터 수은선생이 환국하여 글로 남겨 문집에 실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궁금한 것은 어릴적 많이 들어 왔던 “혹부리 영감과 도깨비” 설화가 우리의 설화인양 이해되어 왔다는 점이다. 수은 선생이 글을 써 전파한 이래 민간에서 전해져 우리 고유의 설화인양 알려지게 되었나. 그러나 그건 아닌 것 같다.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편 “혹부리 영감”을 요약해 보자.

 

“혹부리영감과 도깨비” 설화가 <수은집> 이후 다시 기록으로 나타난 것은 1910년 다카하시 도루(高橋亨)의 『조선물어집[朝鮮の物語集附俚諺]』에 실린 <유취(瘤取)>이다. 이 이야기는 조선과 일본의 내선일체(內鮮一體)나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내세우는 데 가장 훌륭한 근거로 제시되었다. 일본에서는 가마쿠라시대(鐮倉時代) 초기에 발간된 『우치습유물어(宇治拾遺物語)』에 수록되어 오랫동안 전승되어 온 이야기다.

 


특히 에도시대에는 소년용 적본(赤本)에 수록되면서 전국에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의 10대 동화 중 하나로 정착하였다. 이런 이유로 <혹부리영감>은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조선어독본』에 1915년 이후 지속해서 수록되었으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동화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섬찟하다. 나의 어릴적도 그저 재밌는 우리나라 설화로 알았으니. 어릴적 유독 이야기를 잘 해 주는 집안 삼촌이 있었다. 촌수로 보면 당숙이다. 그만 그만한 꼬마들이 모여서 그렇게 집중해 삼촌의 이야기를 듣던게 생각난다. 초등학교 무렵일 거다. 집안 제사가 있거나 명절이면 읍내에서 태자리인 부산 내안리 대소가에 가곤 했었는데, 광주에서 온 그 삼촌의 이야기 보따리는 한이 없었다.

 

중학을 졸업하고는 타관살이 한터라 어릴적 그 동네도 자주 못가 보고, 그만 그만한 대소가 또래들이나 그 삼촌도 만날 길은 거의 없어져 버렸다. 그러다 역사를 공부한다고 들어 선 길에서, <수은집> “혹부리 영감”을 글을 읽은 것이다. 1988년. 우리 거 맞았나?

 

그러다 다시 찾아 보니 일본 동화의 강제 이입 시기가 있었던 것. <수은집> 전래의 그 설화와는 무관하게 강요된 이입 동화를 들으며 자라났던 것. 73주년 8월이어  더 부끄러움이 앞선다.

 

그래도 더 찾아 볼게 있다. 1618년에 별세한 강항선생의 <수은집>에 실린 이 “유계(瘤戒)” -혹부리 영감과 도깨비- 설화는 그 이후 우리 민간에서는 어떻게 전승되었을까. 1910년 “유취(瘤取)”가 기록으로 나타나기 전까지. 하여 1618~1910 사이 “혹과 도깨비” 기록과 자료 찾기는 계속된다.

 


[국역문]

혹이 붙음을 경계함

여송은 동해속의 작은 나라다. 땅의 좁고 물고 거세게 흐름으로 사람들이 혹이 많았다. 갑이라는 사람이 이마위에 혹이 생겨 거의 동이만큼이나 커짐으로 머리가 눌려서 일어날 수가 없자 그 처자가 부끄럽게 생각하여 내쫓으니 산속으로 가서 자고 눕기를 며칠을 했다.

하루는 밤중에 산도깨비들이 북을 치면서 여럿이 떠들어대며 먼데서부터 오고 있었다. 갑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장단을 맞추어 일어서서 춤을 추며 두려워하지 않은척하였다. 그러자 도깨비들은 혀를 널름거리며 서로 보고 하는 말이「이상하다. 이런 빈 산속에 이렇게 즐길줄아는 좋은 친구가 있을 줄 몰랐다」면서 연달아 북을 치기를 마지아니하니 갑도 또한 춤추기를 마지 않았다.

하늘이 밝아지려 하자 도깨비들은 갑을 보고 말하기를「우리는 도깨비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머물러있을 수가 없으니 이제 갔다가 내일 밤에 다시 올 것이니 당신도 오겠소?」하였다.


갑이「그러겠다」고 하자, 도깨비가 세 번을 다그쳐 묻거늘 갑이 세 번을 대답을 했으나 도깨비가 오히려  믿지 못하고「사람의 마음은 믿을 수가 없으니 당신의 혹을 따서 저당을 잡아놔야겠소」하더니 드디어 혹을 따가지고 가버렸다.

갑은 어찌나 기쁜지 한걸음에 뛰어서 집으로 오니 모두가 보기에 다시 완전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처자들도 다시보고 이웃마을에도 이 사실이 곧 바로 전해져 갔다.

이웃마을에 사는 을이라는 사람도 혹이 붙어있어 거의 모갑의 크기만이나 했다. 갑이 혹이 없어졌단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달려가서 묻자 갑이 모두 일러주었다.

그러자 좋아라고하며 곧바로 갑이 전날가서 누워있던 자리로 가서 있으니까 밤중에 산 도깨비들이 과연 북을 치면서 떠들어대고 오는지라, 을은 미리서부터 일어나 한창춤을 추어 모갑의 하던 짓과 똑같이 하니 도깨비들은 와서 좋아라며신의가 있소그려?」하면서「당신이 신의를 지키지 않을까 무서워서 혹을 따서 저당을 잡았는데 당신이 이미 이렇게 왔으니 당신의 혹을 돌려주겠소」하고 갑에게소 딴 혹을 을의 이마에도 붙여주고 떠나버리니 두 혹이 마주 붙어있어 마치 두 개의 무덤과 같게 되었다.

을은 크게 슬퍼하며「하나의 혹도 견딜 수가 없었는데 하물며 두 개의 혹을 어떻게 견디리오」하고 마침내 스스로 골짜기에서 목을 매달고 죽어버렸다.

일본의 동경의 중 순수좌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가 포로로 써 살아서 돌아와 밝은 세상에 버림을 받았고 나도 세상과는 아주 잊어버려 이 몸이 일찍이 일명의 벼슬이라도 했던 신분임을 잊고 지낸지 오래다.

친하게 지낸 사람이 혹 권하기를「자네가 벼슬이 높아지는 것에 뜻을 끊기를 마치 내시가 방실에 뜻을 끊은 것과 같으니 어찌 벼슬을 구하여 폐기된 부끄러움을 씻지 않는가?」하였다.

나는 응답하기를「가령 벼슬을 구하다고한들 누가 곧 벼슬을 주겠는가. 앞날의 수치도 씻지 못하고서 다시금 뒤의 수치를 얻을까 싶노니 그렇게 되면 이 을이라는 사람이 하나의 혹을 없애려다가 도리어 두 개의 혹을 얻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하자, 권하던 사람이 한숨을 쉬고 가버렸다.



[원문]

瘤戒

呂宋 東海中小國也 地偏而水又湍駛 故人多癭瘤 某甲額■生瘤 幾如甕盎 抑首不能起 其妻子羞而逐之 寢息山間者數日 夜半 山鬼擊鼓群譟 自遠而近 甲不勝其怖 應節起舞 示若無懼者然 山鬼吐舌相顧曰 異哉 不意空山中 有此良朋之可與娛者 因擊鼓不已 甲亦舞不已 天欲明 鬼謂甲曰 我鬼非人 日出不可留 來夜當復來 公亦能復來耶 甲曰諾 鬼三問甲三諾 鬼猶不信曰 人情難保 請取公瘤以爲質 遂枿取瘤去 甲喜幸走倒 至家則全人矣 妻子改觀 隣里聳傳 某乙額又有瘤 幾如某甲之大 聞甲之失瘤 盤跚往問之 甲悉告之故 喜甚 直造甲所寢息地而胥之 夜半 山鬼果擊鼓讙叫而至 乙豫起亂舞 一如某甲之爲 山鬼至 喜曰有信哉 相與盡懽而罷 遂謂乙曰 恐公失信 故取瘤爲信 公旣能來 可還公瘤 遂取甲瘤安之乙額而去 對峙如雙家 乙大慟曰 一瘤之不堪 而況兩瘤耶 遂自經於溝瀆死 日東僧舜首痤 爲余談是事 余以俘擄生還 見棄於昭世 余又與世相忘 久而不知身之曾忝一命也 所親或勸之曰 君之絶意於榮進 譬如黃門之絶意於房室 盍且求之 以洒廢棄之恥乎 余應之曰 籍令求之 誰卽與之 前恥之未洒 而竊恐更得後恥 此與某乙欲去一瘤而更得雙瘤何異 勸者太息而去

 

강항(姜沆, 1567~1618), 瘤戒, <睡隱集> 卷三 雜著[한국문집총간 73집 069면]/전라남도, <국역 수은집>, 1989. 240쪽~242쪽.

 

 

강항선생 저술 <수은집> 국역 원고(일부).

한학자의 국역문에 윤문과 교열을 맡았는데, 1988년 당시 원고 일부를 보관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3인의 필적이다. 원고는 송담 이백순님, 붉은 글씨는 현암 이을호관장님 필적이다.

사이 사이 작은 글씨는 김희태 윤문분. 두분 대가들 곁에서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길이었다. 보통 책을 낼 때 출판사에서 편집(사진식자) 완료하면 원고는 폐기해 버리기 일 쑤인데, 버리지 못하는 성미 때문에 따로 챙겨 두었던 것 같다. 돌아 보니 30년이다. 어쩌면 "혹부리영감과 도깨비" 부분인 "유계(瘤戒)"의 국역문 원고 있을 것 같다. 그것부터 찾아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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