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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화암사
등록날짜 [ 2018년09월26일 21시08분 ]



끝과 끝이 만난다. 다른 끝과 끝이 만나는 곳이 있다. 설악산과 금강산 경계가 나뉘는 곳이다. 바로 금강산 첫 봉우리인 신선봉에 오르면 그 풍광을 마주할 수 있다지만 
 

 

강원도 고성에 화암사라는 천년 고찰이 있다. 일주문에는 "금강산 화암사(金剛山 禾巖寺)"라고 표기돼 있다. 금강산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내린 끝자락, 또는 반대로 금강산이 시작되는 초입에 터 잡고 있기 때문이다.

 

화암사를 품고 있는 산이 금강산의 줄기라는 뜻이다. 화암사를 거쳐 금강산 줄기인 신선대(성인대라고도 함) 화암사를 들머리로 잡고 타원형으로 빙 돌아 원점 회귀하는 것으로 '화암사 숲길'이라고도 하는 쉽고도 경치가 절경인 곳이다.

 

이름부터 금강산화암사로 예사롭지 않은 곳이다. 화암사 제2주차장에서 고개만 돌리면 범상치 않은 바위가 눈에 띈다. 계란 모양의 바위에 왕관 모양의 또 다른 바위가 놓여 있는 형태로 수바위로 불린다. 바위 위에는 둘레 5m의 웅덩이가 있다고 한다. 이 웅덩이에는 항상 물이 고여 있어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다. 수바위 이름의 자를 물 수로 보는 이도 있지만, 그 생김새 때문에 빼어날 수로 보는 이도 있단다거대한 바위는 쌀 바위란 뜻으로 쌀 수()’자를 써 수암(穗巖)’이라 불렸고, 저 절의 원래 이름 화엄사쌀 바위 절이란 의미의 벼 화()자를 써 화암사(禾巖寺)’라 부르게 되었단다.
 

 

일주문에 걸려 있는 금강산 화암사(金剛山 禾巖寺)’ 편액, 금강산을 품은 문으로 부족함이 없다. 나그네 마중한 일주문 저 멀리 보인다. 내려오는 길 오른쪽에도 시비 서 있다.

 

일생을 돌고 돌았으나 한 걸음도 옮긴 바 없나니 본래 그 자리는 하늘과 땅보다 먼저이니라월산 스님 열반송이다열반송 새긴 시비 저 일주문까지 이어지겠지. 산 오르다 깨쳤다면 내려오는 길에 열반에 들어 보라는, 아니 하산 후의 홀가분한 마음 하나라도 잘 간직해 일주문 나서라는 어느 선사의 당부인 듯싶다. 일주문에 걸려 있는 금강산 화암사(金剛山 禾巖寺)’ 편액, 눈 맞은 손돌바람에도 두 기둥에 의지한 채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금강산을 품은 문이다.

 

화엄사는 769(신라 혜공왕5) 진표율사가 창건해 금강산 화엄사라 했다, 6.25전쟁과 화재로 중건을 거듭하다 1912년 일제 때 사찰령에 의해 건봉사의 말사로 편입되면서 화암사로 바뀌게 되었다.

화암사에서 들려오는 불경소리가 산사를 울리고, 속세의 번뇌를 사라지기를 기원하면서 수바위에 닿는다.

 

수바위(穗巖)

수바위에는 계란모양 거대한 암석에 왕관모양의 또 다른 바위가 놓여 있다. 그 위에 둘레가 5m쯤 되는 웅덩이가 있다. 이 웅덩이에는 물이 항상 고여 있어 가뭄이 들면 웅덩이 물을 떠서 주위에 뿌리고 기우제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면 하늘이 이 웅덩이를 채우려 비를 내린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바위 이름에 물 수()자를 써야한다는 사람도 있고, 바위의 생김이 범상치 않으니 빼어날 수()자를 써야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수()바위, 쌀바위라 부르게 된 설화가 버젓이 전해 내려온다.

 

화암사는 산이 깊고 길이 험해서 무척 양식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마을로 내려가 탁발해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절집 식구들은 늘 배가 고팠다. 그러던 어느 날 정진하던 두 스님의 꿈에 똑같이 백발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수바위에 조그만 구멍이 하나 있으니 지팡이를 넣고 세 번 흔들면 끼니때마다 2인분의 쌀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 두 스님이 수바위로 올라가 구멍에 지팡이를 넣고 흔드니 딱 2인분의 쌀이 나왔다. 쌀바위는 그렇게 두 스님을 고승으로 키웠다.

그런 어느 날 객승이 찾아들었다. 객승은 바위 구멍에서 지팡이를 세 번 흔들어 2인분의 쌀이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세속의 어리석음을 버리지 못한 그는 불현듯 욕심이 생겨났다. 혼자 많이 먹고 싶었다. 300번을 흔들면 200인분의 쌀이 나올 것이라며 지팡이를 집어넣고 마구 휘저었다. 그러자 바위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 후 바위는 쌀을 토해내지 않았다. 저 바위는 그 때부터 쌀 바위란 뜻으로 쌀 수()’자를 써 수암(穗巖)’이라 불렸고, 저 절의 원래 이름 화엄사쌀 바위 절이란 의미의 벼 화()자를 써 화암사(禾巖寺)’라 부르게 되었다.

 

이 설화에 기인하여 수바위 아래 절을 벼화, 바위암을 써서 화암(禾巖)사라 부르게 되었다.화암사는 신라 혜공왕 5(769)에 진표율사가 창건했다. 처음 이름은 화엄사였다. 금강산 화엄사 사적기는 이렇게 전한다.‘옛날 진표율사께서 창건하시어 화엄(華嚴)이라 편액하셨다. 화엄이라 한 것은 화엄대교를 강론하여 인천(人天)의 여체(餘滯)를 씻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액(題額)하셨으니 속세에서는 화암이라 칭하였다.율사께서 화엄경으로 신도 100명을 교화하니 대낮에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 31명이요, 그 나머지 69명은 돈오무상(頓悟無上)을 얻었다. 그러므로 절 이름을 화엄사라 했다.’진표율사는 금산사와 법주사를 창건하고 금강산에 들어 세 절을 세웠다. 동쪽에는 발연사, 서쪽에는 장안사, 남쪽에는 화암사를 두어 금강산을 미륵부처님의 정토로 삼았다.

 

사적기 등에 따르면 화암사는 다섯 차례나 화재로 큰 손실을 입었다. 불이 잦은 이유는 절 남쪽에 있는 수바위와 북쪽에 있는 코끼리모양의 바위가 서로 맥이 화해롭지 못하고 상충하여 그 화기가 절로 떨어졌기 때문이란다. 그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지금의 절은 창건당시 위치에서 남쪽으로 1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사적기는 1623년에 일어난 화재의 참상을 이렇게 전한다.‘부처를 모신 감실과 승료가 거듭 화재를 입어 빈터만이 남으니, 구름은 향대를 시름겨워하고, 숲 아래 시냇물은 오열하였다.’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중창하였음을 장하게 기록하고 있다.

 

! 이 절이 여러 번 폐흥(廢興)함은 조화무수(造化無數)의 사연(使然)이 아님이 없으니, 어찌 그 사이에 인력(人力)을 용납하랴. 하늘이 길고 오래도록 이 산이 무너지지 않고, 전현(前賢)과 후철(後喆)이 서로 이어 의지하여 돌아가, 이 절의 쇠퇴와 성흥을 몇 번이나 보았는지 알지 못하니, 참으로 천지와 더불어 선후(先後)하여 시종이 없이 다하였구나.’1863(고종 원년)에 또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이전했는데 바로 지금의 화암사 자리이다. 그리고 1912년에 화암사로 공식 개칭했다.

 

어찌 보면 계란 바위에 왕관바위 하나 더 얹혀 있는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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